소유하지 않는 사랑 - 브람스와 클라라

클라라(Clara)는 브람스의 여성 관계를 얘기할 때, 아니 그의 인생 전체를 다룰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누가 뭐래도 클라라는 브람스가 평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으며, 심적으로 브람스가 가장 가깝게 의지한 친구였다. 브람스는 1853년 그이 나이 20세 때 뒤셀도르프의 슈만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클라라를 처음 보게 됐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당시 클라라는 슈만과 결혼(1840년)하여 13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상태였고, 남편 슈만과의 사이에는 이미 마리, 엘리제, 율리,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오이게니 등 여섯명의 아이를 두고 있었다. 즉 브람스는 클라라를 여러 명의 아이를 둔 슈만의 아내, 즉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으로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브람스가 클라라를 만났을 때, 그녀는 연주활동을 거의 중단한 채 가정 주부로 살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녀는 당시 음악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사였다. 브람스는 자신의 경력 초창기에 만나게 된 클라라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던 그녀는 이미 브람스가 가려는 길 저 앞에 서 있었던 대선배였기 때문이다.
물론, 브람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주는 클라라의 이지적이고 순결한 성품에 아주 편안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브람스를 처음 본 순간 남편과 함께 대단한 찬사를 보내며 그가 분명한 천재라는 것을 직감했던 클라라도 비록 나이 차이는 심했지만 천재 청년 음악가 브람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남편과 자식이 있는 처지였던 클라라는 브람스를 향한 마음을 적절히 조절해야만 했음은 물론이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한 후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누워 있게 된 1854년부터 아주 열정적인 관계가 되었다. 브람스는 정말 열렬한 연서를 클라라에게 보냈다. 슈만은 1856년 7월 29일에 타계했는데,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56년 5월까지도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다음과 같이 뜨거운 편지를 써 보냈다.


"나의 사랑하는 클라라,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부드럽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싶어요.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시작할 수가 없군요. 흠모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나는 당신을 내 연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편지의 열기만을 생각한다면, 슈만이 타계하게 되면 브람스는 분명히 클라라와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은 확실히 빗나갔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의 편지는 오히려 급작스럽게 냉각되었다. 그것은 분명 서서히 식은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차가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브람스와 클라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음악의 귀중한 동료이자 조언자로 생각했고, 때로는 그녀에게 남동생 혹은 아들 같은 존재가 되기도 했다. 슈만이 정신병동에 누워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불처럼 뜨겁던 그들 사이가 왜 그렇게 차분한 이성적 관계로 돌변했을까? 이 갑작스런 감정의 냉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슈만 서클의 정신주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는 먼저 슈만의 서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브람스는 1853년 뒤셀도르프에 가서 슈만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슈만 주위의 사람들, 즉 슈만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슈만의 서클은 부인인 클라라는 물론이요 요아힘, 율리우스 오토 그림, 알베르트 디트리히 등의 음악인과 베티나 폰 아르님 등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서클의 사람들은 모두 높은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유토피아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격조높은 정신주의를 꿈꾸었다. 그들이 세운 유토피아에서는 '순수주의', '고결한 영혼', 그리고 거룩하고 숭고한 '관념론적 사고'가 숭배되었다.지금 그들의 대화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당시 슈만 서클의 사람들이 남긴 말로 검토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고결한 정신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순수', '고결한 영혼', '고상한 취미'를 이상으로 삼는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슈만 서클의 사람들이 쓴 용어나 표현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관념적이고 낭만적이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부분도 많다. 하지만 당시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말을 쓰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휘자 푸르트뱅글러가 '독일 낭만주?자 중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지만 슈만은 속된 것을 진절머리나게 싫어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비밀결사인 다비트 동맹은 혼탁한 당시 음악계의 속물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슈만이 무척 아끼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역시 고결한 정신성을 강조하는 슈만 서클의 중요 인물이었다. 슈만과 리스트 두 선배를 존경하다가 결국 슈만을 섬기고 리스트와 절교를 선언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고결한 정신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물론 서클의 친구였던 기젤라 폰 아르님, 헤르만 그림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고결한 정신주의를 얘기하는 표현을 많이 썼다.


클라라와 브람스의 신뢰
비록 여성이었지만 클라라 슈만 역시 슈만 서클의 '고결한 정신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브람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포함한 슈만 서클을 '마음이 바른 사람들의 작은 집단'이라고 표현하였고, 서클의 구성원들은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자존심을 지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클라라는 진정한 마음과 영혼을 지닌 예술가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브람스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고, 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며 작곡가였던 안톤 루빈슈타인을 '성스러운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했다.이런 사실들은 클라라의 예술에 대한 평가기준이 주로 고결한 정신주의에 입각해 있었음을 역력히 보여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클라라는 아버지와 법정투쟁까지 벌여가면서 슈만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어렵게 골인한 결혼 생활을 슈만 부부는 아주 성스럽고 완벽한 사랑으로 유지해 갔다. 그녀를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슈만과 클라라의 결합이 아주 보기 드문 '고결한 사랑의 결정체'임을 잘 깨닫고 있었다.
비록 나중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 서클의 멤버였던 브람스 역시 고결한 정신주의의 신봉자였다. 슈만 서클의 사람들은 특히 브람스를 '고결한 영혼'의 화신으로 보고 있었다. 브람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으로 슈만과 클라라의 독특한 부부애를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다. 그는 부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최상으로 존경하는 용어를 선택하곤 했다.
클라라나 브람스가 '고결한 정신주의'의 신봉자였다는 점은 그들이 어떤 문제든 가볍게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즉 그들은 한때 맹목적인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내면에 굳게 자리잡고 있는 윤리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을 쉽게 달려들어 저질러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클라라와 브람스가 똑같이 '고결한 정신주의'를 표방하며, 또 그 자신들이 실제로 고결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결합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를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다. 즉, 브람스는 브람스대로 자신의 중요한 은인이기도 한 슈만에 대한 존경심과 예의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클라라 역시 남편에 대한 사랑과 브람스한테서 느끼는 사랑을 아주 맑은 시각에서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 고결한 연혼이 서로 호감을 갖는 방식은 오로지 '정신적인', 즉 '플라톤적인' 사랑으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사랑을 위해 브람스는 의도적으로 클라라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했다. 비록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겉모양의 소유 형태로 가져가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결코 변치 않았다. 바로 이 점, 즉 그들의 열정이 냉각되긴 했지만, 그들 관계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는 점이 클라라와 브람스 사이에 있었던 사랑의 아름다운 면이다.
대개 열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났다고 보는 것이 통례이나, 그것은 사랑을 '좋아함'이라고 규정할 때에 흔히 인정되는 논리이다.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는 불같은 열정이 말끔히 걷힌 후에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열정은 식었다기 보다는 차라리 정제되고 어떤 상태로 승화된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 23세의 브람스와 37세의 클라라는 이제 그렇게 정제된 사랑의 관념을 가지고 서로 부족한 한쪽 날개 역할을 해 주며 살아가게 되었다.


클라라의 도움
클라라는 우선 본격적인 음악가 경력을 쌓으려는 브람스에게 대단히 중요한 안내자가 되었다. 당시 클라라는 음악계에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인사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브람스가 경력 초기에 데트몰트의 궁정 음악가 생활을 하게 된 것도 클라라를 통해 이뤄진 일이었고, 그밖에 브람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유명 음악가나 출판인들에게 소개장을 써 주거나 편지를 해 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작품을 직접 연주, 소개하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브람스와 요아힘을 데리고 단치히나 북독일에서 연주여행을 했는데, 유명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덕분에 브람스의 능력은 훨씬 더 돋보이기도 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경제적인 문제들,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들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브람스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는 편안하게 위로해 주었고, 영광스런 일이 생겼을 때는 더욱 더 그 자리를 빛나게 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클라라였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로 혹은 작곡가로 대선배였던 클라라는 브람스 작품의 가장 뛰어난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클라라는 여러 명의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음악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브람스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조언해 주었다. 물론 브람스 주위에는 클라라말고도 그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요제프 요아힘은 그의 창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레비, 헤르초겐베르크 부부, 그리고 빌로트 등 음악적 감식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 브람스는 그 훌륭한 조언자들의 말을 잘 경청해 자신의 작품에 끊임없이 반영하였다. 하지만 그 조언자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대인관계에 요령이 없는 브람스의 무뚝뚝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라라만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조언자였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무뚝뚝함마저도 잘 이해하고 포용한 사람이었다.


클라라의 깊은 이해심
브람스 주위의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클라라 역시 브람스의 대인관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또 브람스의 속마음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그가 속에 지니고 있는 내용에 뭔가 다른 깊이가 있다는 점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음악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람스의 본성을 이해했다.클라라는 브람스의 음악이 결코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은 브람스 작품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가치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언젠가 클라라의 친구인 *리비아 프레게(Livia Frege)가 브람스의 '발라드'를 듣고 금방 높은 평가를 내리자, 클라라는 브람스의 작품이 그리 만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하며 그녀의 예단에 일침을 놓기도 했다.


*프레게, 리비아(Frege, Livia 1818-1891)
소프라노 가수. 클라라 슈만의 옛날 라이프치히 친구. 그녀는 일찌감치 콘서트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자신의 집에서 많은 위대한 작품들을 편곡해 놓기도 하는 등 여러 해 동안 라이프치히 음악계의 중심 인물로 기억되었다.


클라라는 남편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슈만의 음악에서 그녀는 항상 부드럽고 선율적이고 달콤한 그 무엇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브람스의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은 좀 달랐다. 그녀는 브람스 음악의 외관을 거친 껍데기에 비유했다. 그리고 가장 거친 껍데기를 가진 열매의 속이 가장 달콤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비유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거친 껍데기의 이미지만 받아들이고 쉽게 포기해, 그 안에 들어있는 말할 수 없이 달콤한 속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클라라 자신은 브람스 음악이 지닌 정말 아름다운 내면의 모습을 잘 인지했다는 뜻이 된다. 아무튼 그녀는 스스로 브람스 음악의 가치와 브람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깊은 이해심으로 클라라는 브람스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람스의 도움
브람스의 경력 초기부터 얼마간은 주로 클라라가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입장이 조금씩 바뀌었다. 브람스는 날이 가면 갈수록 성공한 음악가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고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브람스가 특히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된 시점은 그가 음악 동호인협회의 예술감독을 지낸 이후였다. 그 시점에 그는 사실상 봉급이 필요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상당히 저명한 예술가가 되어 연주 몇 번만 해도 충분한 수입이 되었고, 거기다가 작품 출판 등을 통해 계속 들어오는 돈으로 꽤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최만년 클라라가 돈 때문에 걱정하게 되자, 브람스는 자녀들을 위해 주는 것이니 편안하게 받으라며 1만 마르크를 보내려고 했지만 클라라는 사양했다. 브람스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가정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길을 찾아나섰다. 브람스가 찾은 방법은 자신이 슈만 기념재단의 익명 기부자가 되는 일이었다.
클라라는 자신의 건강 문제를 포함, 사적인 문제까지도 브람스에게 거리낌없이 털어 놓았다. 이를테면 콘서트라든가 프로그램, 제자들, 그리고 가르치는 일 등에 대해서 클라라는 브람스와 끊임없이 대화했으며, 그 중 많은 일들을 브람스의 의견을 존중해 결정하기도 했다. 클라라는 1879년부터 1893년까지 남편 슈만의 작품집을 편집 출간하였으나, 그 힘겨운 프로젝트 역시 브람스의 도움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이었다. 클라라는 주위에 가족도 친구도 많았지만, 자기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꼭 브람스와 먼저 상의했다. 중년 이후 저명한 인사가 되어 바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브람스는 클라라의 말을 항상 경청했으며, 도울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 주었다. 클라라는 자신에 대한 브람스이 헌신적인 사랑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 잘 느끼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변론
이 정도의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보통 남녀간에 결혼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관계를 우정이라는 말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클라라와 브람스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은 사랑보다는 우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관계는 일반적으로 동성간의 친구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우정과는 그 깊이 면에서 많이 달랐다.그들 사이에는 정말 진심을 다한 깊은 신뢰, 깊은 연민, 깊은 이해심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우정보다는 진하고 사랑보다는 약한 어떤 용어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 사이를 넓은의미의 '사랑'이었다고 규정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우정도, 그것이 진정한 것이기만 하다면 사랑의 일종이다.
우리는 보통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조화를 이뤄야 완전한 사랑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육체적 사랑이란 '좋아함'의 다른 용어일 뿐이다. 육체적 사랑이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생리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육체처럼 그리고 육체와 함께 유한한 생명을 지닌 것이다. 즉 이 다음에 육체가 없어지면 그것도 없어진다는 뜻이다.우리는 사랑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육체적 사랑이란 말은 적절하지도 않다. 그것은 세상을 살면서 계속 변덕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며, 결국에는 육체와 함께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사랑이란 육체적 좋아함인 것이다. 육체적 좋아함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1분 1초도 부담스러운 순간이 없던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에 대해 느끼던 그런 감정이 먼 훗날 그녀가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에도 느껴질까? 아마 그런 외모의 변화에도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면, 그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욕체적 욕망이나 소유와 일치하지 않으며, 진정한 사랑이란 모두 정신적 사랑일 뿐이다. 확실히 진정한 사랑이란 모두 정신적인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현실적 소유와는 무관한 것이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 - 그것은 결혼을 하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며, 독신주의를 강조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으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브람스도 무척이나 동경했다). 그것은 결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결혼을 하지 않아도 완전한 사랑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즉 사랑의 관건은 모든 것이 육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라 정신적 교감이 어느 정도 깊이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한다.사랑이란 물질의 세계에서 태어나 진화한 것이 아니라, 만져지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정신세계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발전이란 계속 복잡하게 변화하는 물질의 진화 과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순화를 통해 더 맑아지는 어떤 것일 뿐이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결혼하지 않고서 서로를 완전히 소유했다. 그들은 서로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소유했다. 그 완전한 소유는 한계가 있는 육체적 소유가 아니고 무쇠보다도 강한 정신적 소유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녀간에 아니 이 세상 누구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의미의 '소유하지 않는 사랑', 즉 '정신적 소유'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고 결과도 보이지 않는 정신적 사랑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 물질과 쾌락이 난무하고 그 속에서 표피적인 느낌에 쉽게 자신을 내맡기는 요즘의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람스와 클라라는 그렇게 어려운 사랑을 했다.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깊은 신뢰를 갖게 된다.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만약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이 아니고 바그너와 클라라의 사랑이었다면 어땠을가? 뷜로우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에 대한 바그너의 소유 형식이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그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순간이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승화된 정신적 사랑을 통해 슈만에 대하여, 그리고 '영원한 사랑에 대하여'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짐로크를 제외하면, 평생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썼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클라라는 비록 이성이었지만, 브람스가 자신의 고뇌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언젠가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나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불러 주었다.브람스는 만년에 70세가 넘은 클라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과 당신의 남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을, 그리고 가장 값진 보물과 가장 고귀한 순간들을 주셨습니다." 클라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브람스는 '내가 평생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출처_ 요하네스 브람스 그의 생애와 예술
지은이.펴낸이/이성일, 펴낸곳/파파게노
321쪽 ~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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